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2.12 군사반란 (문단 편집) === 작전 개시 === 드디어 1979년 12월 12일 저녁, 전두환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하나회 소속의 주요 지휘관들은 각자 준비를 마친 후 [[경복궁]] 옆 구 [[일본 육군]] [[일본 제국 육군/헌병|헌병]] 주둔지[* 현재 [[경복궁 태원전]] 자리]에 위치한, [[장세동]] [[보병]][[대령]]이 단장이던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집결하였다. 당시 [[제1경비단|30경비단과 33경비단]]은 서울 방위의 정예부대로 [[수도방위사령부|수경사]] 소속이기는 했지만 수경사령관도 무장 출입은 불가할 정도로 독립적인 부대[*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이 자신의 라인으로 관리하던 곳이였다. 비록 배속은 수경사였으나, [[대통령경호실]]의 통제를 받던 곳이기에 이런 행위가 가능했다. 훗날 민주화 이후 두 부대는 축소 통합되어 [[제1경비단]]이 된다. 지금도 제1경비단은 수도방위사령부 소속이나 실제로는 [[대통령경호처]]가 관리하다시피 한다.]였기 때문에 이들이 몰래 모이기에는 딱 좋았다. 이날의 작전명은 '생일집 잔치'. 이들의 본래 계획은 보안사의 합수부 수사관들과 육군 수경사의 헌병들을 동원하여 참모총장 공관에서 정승화를 납치해서 합수부로 데리고 가는 동시에 전두환은 대통령에게 가서 정승화의 추가혐의를 조사하기 위한 합수부로의 체포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이 체포행위를 합법화하는 것이었다. 이후 법적 처벌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대통령 재가를 먼저 받지 않은 이유는 정승화 체포 의도가 정승화에게 알려질 경우, [[역관광]]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보안사령부 인사처장이자 합동수사본부의 핵심 브레인이었던 허삼수 육군 보병대령[* 전두환의 직속 오른팔이었던 허삼수가 방문한다고 하면 의심받을 것이기에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 육군 보병대령을 사칭해서 권 대령이 총장님을 잠깐 방문하겠다고 연락했다. 그래서 사태 초기에는 정보처장이던 권 대령이 진압군 측으로부터 욕을 먹었다. 권정달은 이후 [[5.17 내란]]의 계획을 작성함으로써 신군부의 정권장악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은 합수부 수사관들 및 수경사 33헌병대와 함께 정승화 총장의 관저를 찾아가서 김재규에 동조했다는 혐의에 대한 진술 조사를 해야겠다는 명목으로 정 장군의 신병을 확보하여 강제로 서빙고로 끌고 오는 데 성공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정승화 체포와 동시에 '''정승화 체포수사에 대한 대통령 재가를 받아서 합법화하려던 원래 계획이 대통령의 재가 거부로 인해 실패'''했다는 것이다. 당시 [[최규하]]는 전두환의 단순 진술로는 절대 정승화의 체포에 동의할 수 없으며, 합동수사본부의 상급자에 해당하는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과 상의를 한 후에야 재가를 검토하겠다고 버텼다. 당시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전두환 측에서는 국방장관을 사전에 확보해놓지 않았었고, 국방장관 공관에 있던 노재현 국방장관은 인근의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나자 무슨 일인지 확인조차 안 한 채 가족들과 도망가버려서 찾을 수 없었다. 노재현 국장방관의 구체적인 도망 행적을 보면, 먼저 근처 [[단국대학교]] 교내로 가족과 함께 피신했다가 부하의 집에 가족을 맡긴 뒤 육본 B-2 벙커로 가서 상황을 보고받은 뒤 다시 미 육군 [[미8군|제8군]] 영내에 있는 [[한미연합군사령부]]로 피신했다가 국방부의 장관집무실로 갔는데 이때 국방부로 쳐들어온 반란군에게 체포당한다. 노재현 국방장관은 예비역 육군 대장에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을 모두 거친 사람이다. 이런 중요한 실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총소리에 놀라서, 근무지인 국방부 청사로 복귀한 것도 아니라 단순히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을 간 것이라는 점에서 답이 없던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정승화 체포가 법적으로 위법한 행동이 되어버렸다. 당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사령부 산하에 있었으므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는 전두환의 직속 상관이 되기 때문에 군 지휘체계상 전두환이 함부로 체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계엄사령관보다 위에 있는 것은 국방장관과 대통령밖에 없었으므로 이들의 허가를 받아야만 계엄사령관 겸 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 체포가 합법이 되는 것이다. 긴박했던 정총장 연행 과정의 상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2일 밤에 정총장 연행을 위해 허삼수 대령이 이끄는 보안사의 합수부 수사관들이 보안사 승용차 2대에 타고 [[한남동]]의 참모총장 공관으로 출발했고, 이들을 백업하기 위해 수경사 [[제33헌병경호대|33헌병대]]원들이 마이크로 버스에 탑승하여 뒤따라 갔다. 총장에게 급히 보고드릴게 있어서 방문하겠다고 미리 연락하여 방문 약속을 잡아놨던 합수부 수사관들은 공관 정문을 통과해서 곧바로 총장 관저로 들어갔다. 뒤이어 33헌병대를 태운 마이크로 버스도 정문에 도착했고 헌병들이 몇 명 내려서 정문 경비를 서는 [[대한민국 해병대|해병대]] 경비병들에게 다가가 우리는 정문 경비임무를 교대하러 온 육군 헌병들이라고 하자 경비병들이 그런 지시는 못들었다며 상부에 확인해 보겠다고 하는 순간 헌병들이 기습적으로 해병대원들을 제압하여 무장해제 및 포박한 뒤 초소 안에 감금시켰다. 그렇게 33헌병대원들은 정문을 장악한 뒤 총장 관저건물 주변 등에서 사주 경계를 섰다. 한편 합수부 수사관들과 함께 관저 안으로 들어간 허삼수와 우경윤은 정승화 총장에게 박정희 시해 사건과 관련된 의혹과 혐의에 대해 자세한 조사를 할 게 있다며 보안사 합수부로의 동행을 요구하자 정총장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허삼수는 임의동행을 거부한다면 수사를 위해 강제로라도 연행할 수 있는 재가를 대통령에게 이미 받았다고 주장하며[* 물론 먼저 재가를 받지 않고 왔으므로 구라였다.] 끌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정승화 총장은 대통령의 연행 승인 재가가 있었는지를 먼저 확인해 봐야겠다며 [[전속부관]]인 이재천 육군 보병[[소령]](육사 26기)에게 전화로 확인해보라고 지시했고 이 소령이 청와대에 전화를 걸려고 하자 이를 제지하고 협박하기 위해 합수부 장교가 권총을 발사해서 이 소령은 총상을 입었다. 그러자 참모총장 경호장교인 김인선 육군 보병[[대위]](육사 29기)가 합수부 수사관들을 향해 [[권총]]을 뽑아들었고 그 순간 수사관 장교들이 총을 발사해서 김 대위 역시 총상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33헌병대를 데리고 온 같은 편인 우경윤 헌병대령도 유탄으로 인한 총알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정 총장을 강제로 끌어내어 승용차에 태운 후 두 승용차는 공관을 떠났고 보안사의 [[서빙고 분실]]로 데려갔다. 그러나 데리고 온 헌병대를 직접 지휘해야 할 우경윤 헌병대령은 오발로 중상을 입은 뒤 업혀 나가서 정신이 없었고 합수부 수사관들도 탈 많고 요란했던 정승화 장군 연행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관저 건물 밖에 있던 33헌병대원들에게 우리 뒤를 따라 철수하라는 명령을 누구도 내리지 않고 깜빡한채 자기들만 떠나버렸다. 아무 지시도 받지 못하고 공관 내에 남겨진 33헌병대원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한동안 어리둥절해 있다가 결국 자기들도 철수하기로 하고 마이크로 버스에 탑승하였다. 한편 연행을 위해 합수부와 정승화 총장 측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공관 관리관 반일부 육군 [[준위]]가 몰래 공관 밖으로 탈출하여 공관 인근에 주둔한 해병대 경비대 막사로 달려가 괴한들이 침입해서 총장을 납치하려 한다고 알렸다. 반 준위의 급박한 신고를 받은 경비대가 공관으로 출동하여 공관 정문 초소를 탈환하고 정문을 봉쇄했다. 그리고 아직 공관 영내에 있던 마이크로 버스를 포위하고 그 버스에 타서 막 출발하려고 하던 헌병들에게 사격을 가해서 헌병들은 그 마이크로 버스 안에 그대로 갇혀있게 된다. 하지만 앞서 서술했듯이 '''정승화 총장을 연행한 합수부 차량은 이미 공관을 떠난 후였다.''' 정승화 총장을 태운 합수부 차량이 공관 정문을 떠난 지 약 10여 분 후에 공관 경비대 병력이 정문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리고 총성으로 인한 신고를 받고 출동한 [[서울특별시경찰청|경찰]], 공관 쪽 총성을 듣거나 보고를 받고 출동한 [[대한민국 해군본부]]의 기동타격대와 [[대한민국 공군본부]] 기동타격대, 국방부와 수경사의 5분대기조[* 당시 한남동은 외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육,해,공 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 공관이 모두 모여있는곳이기에, 여러 단체의 병력들이 기동타격대로 운용되고 있던것이다 ], 그리고 33헌병대가 따라나오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은 하나회 측이 가서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려서 출동한 30경비단 5분대기조 병력 등이 캄캄한 밤에 공관정문에서 피아식별도 안 되고 대체 무슨 일인지도 모른채 그저 벙찐 상태로 대치하는 혼잡한 상황이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들 중에서 총성을 듣거나 총장이 납치됐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병력들도 '''이게 북한 무장공비의 짓인지, 누가 적이고 누가 우리 편인지 등을 아직 파악조차 못한 혼란한 상태'''였다. 아침 5시 30분경에 국방부 차관이 공관 측에 전화를 걸어 거기 있는 병력은 모두 아군인 국군들이고 다 해결됐으니 출동한 부대들은 대치 상황을 끝내고 모두 원대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려서 모두 이에 따르면서 이 일은 일단락된다.[* 공관의 혼란한 상황을 보고 받은 뒤 일단 아군끼리의 무력 충돌은 피해야겠다는 판단에서 모든 무장병력의 복귀 명령을 내린 것이다.] 한편, 혹시 저항할지도 모르는 친(親) 정승화 계열의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계급)|소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계급)|소장]], 그리고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은 연희동의 비밀 연회장으로 미리 초대하여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준장]]이 대신 접대하도록 유인해 두었다. 이때 수경사 [[군사경찰단(수도방위사령부)|헌병단]]장이던 조홍 [[대령]]도 있었는데, 당시 조홍은 [[하나회]] 소속이 아니었지만 정병주, 장태완, 김진기 장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와 있던 것이었다. 이날 회식의 의미가 매우 중요한데 장태완 장군의 저서 <12·12 쿠데타와 나>를 보면 전두환이 장 장군에게 12월 5일에 김장값 하라며 1백만원짜리 수표 한장을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을 통해 보내주었고, 이어 12월 8일에는 다시 전두환이 조홍 대령을 메신저로 하여 12월 12일 회식 약속을 잡은 것이다. 이것은 12·12가 12월 5일 전부터 계획 되었으며, 정확한 거사 날짜는 12월 8일 전에 정해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전두환을 좌천 시키려 했기 때문에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말도 있으나, 정승화 참모총장이 노재현 국방장관과 일요일에 골프 치며 보안사령관 교체 문제를 논의 한 것은 12월 9일이었다.[* 골프 회동후 노재현 장관은 김용휴 국방차관에게 의견을 물었고, 김 차관은 2시간 만에 즉시 전두환에게 달려가서 귀띔해준다.] 직속 부하인 헌병단장이 연회장에 있는 것에 [[장태완]]이 "허락도 없이 여긴 왜 와 있느냐?"고 호통을 치자 조홍은 "전두환 장군이 저한테 [[준장]] 진급주를 산다고 해서 왔다"라고 답했고, 장태완은 혀를 차며 "그걸 오란다고 오는 네놈이나 직속상관은 건너뛰고 술을 사주겠다는 전 장군이나 똑같이 문제다."라고 면박을 주었다. 이를 보다 못한 정병주는 "이번에 조 대령이 [[준장]]으로 진급했으니 겸사겸사 축하나 해주자."고 장태완을 달래어 조홍은 연회에 동석할 수 있었다. 사족이지만 당시 이 연희동 연회장은 일반 술집이 아니라 가정집으로, 전두환이 연회를 부탁한 '민 마담'의 여동생 집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하나회 회원들이 반란를 모의하기도 했고, 이후에 이곳은 제5공화국 요정정치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평범한 민가로 재건축되었다.[* 서대문구 연희로 15안길 33-10 자리] 어쨌든 전두환 대신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의 접대를 받으며 저녁 7시까지 전두환을 기다리면서 먼저 식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국일 참모장은 [[하나회]] 출신이 아니어서 완전한 정보 통제가 되지 않았고[* 우국일은 쿠데타 사실은 전혀 모른채 다른 장군들을 대접하며 이들을 초대한 당사자인 전두환이 왜 이렇게 늦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훗날 우국일은 김영삼 정부의 전두환, 노태우 사법처리 때 증인으로 출석해, 이들의 군부와 정권 장악 움직임을 증언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김진기]] 헌병감에게 총리공관에서 총격이 발생했고, 참모총장이 납치되었다는 전화가 오자[* 김진기 헌병감이 연회에 참석하기 전 연회장 전화번호를 헌병감실에 알려놓고 나와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셋은 자리에서 일어나 복귀했다. 이때 장태완은 수경사로, 정병주는 특전사로, 김진기는 육군본부로 간다. 그리고 같이 연회장에 있던 조홍은 사령관을 따라 수경사로 복귀하던 도중에 슬그머니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뉴데일리]]에서는 "연회에서 술을 마신 장태완 장군이 술에 취해 앞뒤 분간 못 하며 즉흥적으로 명령을 내렸다."라고 하며 반란군을 강력하게 진압하라는 장태완의 명령이 취중에 잘못된 판단에서 내려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 당시 장태완 장군을 비롯한 일행들은 전두환을 기다리다 보니 [[술]]은 단 한 잔도 마시지 않았었다. 그래서 기다리다 지친 [[정병주]] 사령관이 "전두환 장군이 늦을 것 같은데, 그냥 우리끼리 먼저 한잔 하죠?"해서 막 한두 잔 마실 찰나에 상황을 알게 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정병주의 저 발언 이후 일행이 사태 소식을 접했던 때까지의 시간이 10분 내외이다. 말 그대로 술 한 잔 마실 시간. 본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술 한 잔을 비우는 둥 마는 둥 하고 곧바로 튀어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은 매우 강직하고 고지식한 성품의 소유자들이다. 아무리 전두환이 자신들의 후배라지만, 자신들을 초대한 주빈인 전두환이 오기도 전부터 곤드레 만드레 취해 있을 정도로 몰상식한 행동을 할 이들이 아니었다. 육군본부 측은 [[정승화]] 참모총장의 부인이 건 전화에 의해 처음으로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정승화를 납치한 사람들이 누구인지조차 알 길이 없어서 처음에는 북한 공비들의 짓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곧 납치세력이 합동수사본부, 즉 보안사 소속임이 확인되고 여타 정황들이 종합되면서 전두환 측이 벌인 일임을 확인하였고, 전군에 비상을 걸고 대응에 들어갔다. 수경사령부로 가면서 장태완은 참모장 김기택 준장을 통해 헌병부단장 신윤희 중령에게[* 이후 신윤희는 전두환 측에 회유되어 진압군 지휘부를 체포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경장갑차 2대, 헌병특공대 1개소대, 부상자 구조를 위한 구급차 1대로 기동타격대를 꾸려 총장공관으로 급파하라는 작전지시를 내린다. 이후 사령부로 복귀한뒤 참모장 김기택 준장으로부터 30경비단에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일당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때 보고를 듣던 장태완 사령관이 이들의 안하무인격 행보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못해 보고를 중지시키고 줄담배를 연거피 피워댈 정도였다] 30경비단장 장세동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대신 전화를 받은 선배인 황영시와 유학성이 "알 만한 친구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가? 30경비단으로 와서 우리랑 얘기해 보면 정승화 총장 체포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라고 설득하려고 했지만 장태완은 펄펄 뛰면서 [[야 이 반란군 놈의 새끼야|'''"이 반란군 놈의 새끼들! 거기 꼼짝말고 있거라! 내 전차를 몰고 가서 네놈들 머리통을 다 날려 버리겠다!"''']]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 드라마에서는 황영시-유학성 순으로 통화하는 것으로 묘사됐으나, 실제 통화에서는 유학성-황영시 순으로 이뤄졌다. 이에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일당들은 [[장태완]]이 공격해올 것을 걱정하며 대비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전두환은 하나회를 통해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대통령경호처/지원부대|대통령경호실 소속 병력]][* 당시 [[청와대]] [[대통령경호실장]] 직무대리 [[정동호(1935)|정동호]] 준장,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 작전과장 [[고명승]] 대령은 모두 하나회 소속.]으로 최규하가 있던 [[국무총리]] 공관을 확보하였다. 이미 12월 6일에 대선은 끝났으며, 특히 10.26 사건으로 인한 [[보궐선거]]였기에, 비록 12월 21일 취임식을 하긴 했어도 최규하는 12·12 당시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인수인계와 공관 이전 절차에서 문제가 있었는지, 최규하는 [[국무총리]] 시절 이용했던 총리공관에 있었다. 원래 총리공관 경비는 육군본부 헌병대[* 당시 총리공관 경호대장은 육군 중령 구정길]가 맡고 있었다. 이 때문에 헌병감 [[김진기]]에 의해 전두환 체포 명령이 내려왔으나 재가를 받기 위해 전두환이 총리공관에 더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게 되자, 임기응변으로 [[대통령경호처/지원부대|대통령경호실 병력]]을 보내 헌병대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총리공관을 장악한 것이다. 이후 최규하를 총리공관에 구금하다시피 조치한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 체포에 대해 사후 재가를 계속 요구했지만 최규하는 노재현 국방장관의 동의 없이는 체포를 허가할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숨어버린 국방장관을 찾기 위해 하나회는 발에 땀나게 뛰어다니게 되었고, 육군본부 측에서는 그들이 장관을 찾아서 재가를 받기 전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하나회]]는 보안사 감청망 활용을 통해 이미 정보력에서 육군본부를 앞서고 있었고 조직도 넓게 분포해 있었다. 원래 보안사 자체가 군을 위한 정보기관이다. 그런데 이들이 배신했으니 육군본부는 정보를 얻을 곳이 없어진 셈이다. 전두환 측은 육군본부에 화해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척하면서, 정상적인 국군 명령 체계를 완전히 무시한 채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한다. 강직한 군인인 수경사령관 장태완은 이에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합동수사본부[* &하나회] 측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수도권의 [[충정부대]]를 대상으로 병력출동을 독촉하고 있었다. 전두환 측은 장태완의 병력동원 시도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정승화 총장의 연행을 기정사실화하고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전략을 취하였다. 즉, 겉으로는 신사협정을 맺어서 육군본부의 병력출동을 가능한 오래 저지하면서, 한편으로 자기 측 병력을 본격적으로 동원하여 수뇌부를 무너뜨리겠다는 작전이었다. 애초에 작전에 앞서 전두환은 1, 3, 5 공수여단장들에게 잇달아 지시를 내렸었다. 경복궁 30경비단 모임에 참석했던 이들 여단장 가운데 3공수여단장 [[준장]] 최세창과 5공수여단장 준장 장기오는 비상령이 떨어진 후, 자신들의 부대를 장악하기 위해 부대로 돌아갔고 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은 한발 늦게 [[행주대교]]로 우회해서 귀대해 있었다. 30사단 관할이던 행주대교를 제외한 모든 한강 다리는 수경사의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 아무튼 각 부대에 내려진 지시는 다음과 같다. * [[제1공수특전여단|1공수여단]][* 여단장 (하나회) 준장 박희도 ]을 동원해 국방부와 육군본부 점령, * [[제3공수특전여단|3공수여단]][* 여단장 (하나회) 준장 최세창 ]으로 3공수여단 영내에 있는 특전사령부 본부 건물을 습격하여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 * [[국제평화지원단|5공수여단]][* 여단장 (하나회) 준장 장기오]은 [[효창운동장]]으로 출동, 대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 그리고 하나회 소속 장교들[* 이날 수경사령관 체포작전을 주도한 수경사 헌병부단장 중령 신윤희는 하나회 멤버가 아니었으나 반란군 측에 회유된 상태였다. 이후 신윤희는 소장 계급으로 헌병감을 지내 제대로 반란의 댓가를 받았고 이후 12·12를 적극 변호하는 책을 내기까지 했다.]을 이용해 수경사 [[군사경찰단(수도방위사령부)|헌병단]]을 장악, 수경사로 지휘부를 옮긴[* 원래 진압군 지휘부는 국방부에 있었으나 실병력을 지휘하기 용이한 수경사로 지휘부를 이동했다.] 진압군 측 주요 인사들을[*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육군헌병감 [[김진기]],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안종훈 등]제압하려 하였다. 전두환 측은 공수여단 외에도 사단장 [[노태우]]가 이끄는 [[제9보병사단|9사단]] 29연대[* 16기 [[이필섭]]. 이때 공로로 훗날 합참의장]와 30연대[* 연대장 김봉규. 이때 공로를 세우긴 하였으나, 이건영 군 사령관에게 병력 이동을 보고하는 바람에 별을 못 달았다.] 소속 1개 [[대대]], 30사단의 90연대[* 30사단장 소장 박희모는 육군본부의 진압 명령을 받았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전두환 측에 가세했다.][* 이후 제90기계화보병여단을 거쳐 2020년 12월 부대해체.], 제2기갑여단의 1개 전차대대[* 2기갑여단장 준장 이상규는 하나회 멤버다.]도 중앙청으로 출동하라고 지시했다. [[제9보병사단|9사단]]은 당시에는 물론이고 현재도 우리나라 최전방 예비사단으로 활약 중이며, 특히 당시엔 평시작전통제권까지 주한미군측에 있었기때문에 최전방 부대 병력의 동원이 필요할 경우 '한미군사동맹' 협정에 의거해 [[한미연합군사령관]][* [[주한미군#s-4|주한미군사령관]]이 겸직]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만 가능하다. 반란 이후 이 사실을 알게 된 한미연합군사령관 [[존 위컴]]이 격렬하게 화를 낸 것도 이 때문이다. 박정희의 암살로 엄청난 혼란상태였고 암살범 김재규는 체포했지만 김재규가 북한의 사주를 받고 암살을 했을지도 모를 상황에서 언제 북한이 남침할지 모른다는 위기까지 팽배해 있을 때, 중대한 병력의 절반 가까이를 반란을 위해 무단으로 사용한 이러한 행위는 당연히 불법인 동시에 [[매국노]]짓이나 다를 바 없다.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 이게 얼마나 엄청난 미친짓인지 잘 보여주는 대사가 장태완 장군의 '''"저놈아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전방 병력까지 출동시키진 않겠지…?"''' 그리고 노태우의 [[제9보병사단|9사단]] 예하 1개 [[연대(군대)|연대]] 무단 병력 동원은 [[노태우]]가 [[하나회]] 세력에서 [[전두환]] 다음으로 [[2인자]] 자리에 오르는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작용한다. 노태우는 12·12 군사반란 당시 병력동원에 다소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중요한 순간에 남침까지 무릅쓰고 자신의 전방병력을 동원한 덕분에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출범 이후 장관 및 여당 대표를 두루 거치면서 결국 대통령까지 올라서는 확실한 전두환의 후계자로 올라선다. 물론, 기존 제5공화국의 헌법에 의거하여 현임 대통령인 전두환이 지명해서 물려받는 형식이 아니라 직선제로 선거에서 이겨서 된 것이기는 했지만 전두환이 자신의 퇴임 이후 안위를 위해서 노태우 당선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엄청난 지원을 해줄 수밖에 없었기에 사실상 전두환의 후계자가 맞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현대사에서 이렇게 '''최전방을 지키는 부대를 제멋대로 빼돌려 서울로 진격시켜서 쿠데타로 악용한 사례는 이때가 처음이 아니라 [[5.16 군사정변]] 때도 이미 [[대한민국 육군|육군]]과 [[대한민국 해병대|해병대]]에 의해 저질러진 전례가 있었다.''' 바로 철원 축선을 지키던 [[제5보병사단]]과 김포, 강화를 지키던 [[대한민국 해병대|해병대]] 제1여단[* 현 해병대 2사단] 병력을 각각 사단장 육군준장 [[채명신]]과 여단장 해병대 준장 [[김윤근]]이 빼돌려 쿠데타에 동원했던 것. 이때도 만약 북한이 알아챘다면 북한군이 철원이나 김포를 지나 서울까지 일사천리로 접수할 뻔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